바쁜 남자 혹은 여자와 연애를 한다는 것.

한 때 나는 남자친구가 무조건 나만 바라봐주고, 언제나 나를 생각하며, 어떤 사건, 사고, 내란, 천재지변, 변고, 재앙 속에서도 나를 먼저 생각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로도 부족하여 주입시키고 관철시키려고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 말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이런거지. 내가 필요할 때 항상 내 옆에 있어주는 것. 내가 목소리 듣고 싶어하면 들려주는 것. 내가 보고 싶어하면 얼굴 보여주는 것. 문자 보내면 바로 답장을 주는 것. 참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일들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때로는 밥먹을 시간이 없어 지하철에서 꾸역꾸역 빵과 우유로 떼우며 이동 해야할 때도 있고, 하루에 서너시간 잠자기도 부족하여 10분이라도 시간이 나면 지체없이 잠에 빠지는 적도 있으며, 한 달 동안 청소를 하지 못해 발로 길을 만들면서 방을 걸어다녀야 할 때도 있는데, 과연 저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아마도 나이가 어렸기에 연애에 갖는 환상이 너무 컸던 것이라고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

바쁜 현대인들 가운데 유난히 바쁜 이성을 애인으로 둔 사람들은 저런건 바라지도 않을테니 그저 남들처럼 평범게 데이트 한 번 해보았으면 하는 작은 꿈을 갖고 있다. 매일 보자고 하는 것도 아니니 주말만은 나와 시간을 보냈으면, 하루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목소리를 들었으면, 애정이 담긴 문자 한 통 받았으면 등이 그들의 주 소망이다. 얼마나 검소하고 소박한 바람인가! 그러나 바쁜 애인은 그럴 겨를이 없다.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함은 물론 중간중간 각종 경조사에 참석해야 하고 퇴근 후에도 업무가 연장되니 덜 바쁜 애인은 점점 서운해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두 사람의 바쁜 사이클이 비슷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것 같다. 둘 다 바쁘거나, 둘 다 한가하면 문제의 소지가 적은데, 항상 한쪽은 바쁘고 한쪽은 한가하다면 한가한 쪽에서는 늘 애를 태우고 투정을 부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거나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으면 처음에는 걱정을 하다가 점점 서운해지고, 나중에는 화가나며 급기야 나만 혼자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자괴감마저 갖는다. 그러다가 지친 쪽이 종국에 이별을 고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패턴의 연애가 현재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유명 커뮤니티에 가면 항상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글의 제목 아니던가. '여자친구가 너무 바빠서 힘들어요.' '오빠가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잘 안해요.' '여친이 일 때문에 잠시 시간을 갖자는데요.' '전화 안받는 남친, 정말 일이 더 소중한걸까요' 등등 제목만 들어도 내용이 훤~히 보이는 사연들이다. 그리고 이런 글에 대한 댓글도 항상 비슷하다. '님만의 시간을 갖으세요' '님이 더 바쁜척을 해보세요' '애인에게 관심을 끊고 님만의 생활에 충실하세요' 등등.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대책이 아닌 것 같다.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바쁜 일이 생기면 다행이지만, 복수하는 심정으로 바쁘게 지낸다면 둘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점점 느슨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바쁘게 지내겠다며 각종 동호회 가입이나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가 그곳에서 눈이 맞아 애인을 갈아타는 경우도 심심찮게 봐왔다. (그들은 애인이 자신을 방치했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하고 지당한 결과라고 얘기한다) 

어차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계속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나도 내 생활에 충실하되, 바쁜 애인의 태도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역시 내가 보고 싶고, 그리울 것이다. 짧은 문자 한 개, 전화 통화를 통해 그 사람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나 원래 잘나가는 사람이야~ 항상 바빴어!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애인이라면 지금 당장 10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를 구입하여 버릴 것을 권유한다. "같이 있고 싶은데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라는 애인이라면 기특하고 또 기특한 마음이니 바쁜 와중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지 걱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혼자라는 외로움이 찾아온다면 애인이 없을 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한 번 생각해보자. 그때도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면 이번 기회에 부족했던 교양을 쌓는 것이 어떨까. 그것은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재산이 될 뿐만 아니라 애인에게도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야!'라는 긴장감을 줄 수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해버린다거나(내가 알기로는 백 몇번까지 나왔다) 모차르트 작품 전집을 섭렵한다던가 (모차르트 에디션 180장의 씨디가 Yes24에서 150만원대에 판매되고 있다;;)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가꾸는데 시간을 쓴다면 여러모로 참 좋을 것이다. 혹시 끊임없이 애인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번 연애를 접고 잠시 휴지기를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쨌든 바쁜 남자 혹은 여자와 연애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하면 보고싶고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그것을 자제하려니 어찌 괴롭지 않으리요. 그러나 감정적으로 부딪혀 좋은 인연을 그르치는 것만큼 살면서 후회되고 괴로운 일도 없으니 부디 물리적인 시간의 부족함이 마음의 부족함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없는 시간을 알뜰살뜰 잘 쪼개어 살가운 연애를 하기를, 짧은 만남의 시간이지만 그 심도를 더해 질적으로 훌륭한 만남을 이어가기를 바라고, 노력해야 할 지어다.

by 에스메랄다 | 2009/09/13 21:28 | 사랑과 사람에 관한 잡소리 | 트랙백 | 핑백(1) | 덧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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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꽃선군 at 2009/09/13 21:44
바쁜애인이라도 믿음만 준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Commented by 에스메랄다 at 2009/09/13 23:57
맞아요.. 항상 불안은 같은 마음의 크기가 아닌데서 비롯되니까요. 버려지는 것, 남겨지는 것, 그리고 밀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니까요 ^^
Commented by catty D。 at 2009/09/13 22:30
정확한 정보로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2009년 8월 현재 218번까지 나와있고, 유니버셜에서 나온 154만원대에 육박하는 모차르트 에디션(180CD)은 품절상태여서, 그다지 좋지 못한 연주의 170CD짜리가 12만원대에 구매가 가능하지만 그다지 추천할 수 없지요...라는 얘기를 왜 썼을까요. (쯧)

글의 대상이 누군가를 지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쓰신 글 같아요. 저도 말은 바쁘다고 하는 것이 버릇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시간을 할애하는 바보스러움을 지니고 있답니다. (냐웅)
Commented by 에스메랄다 at 2009/09/14 00:02
218번(ㅎㄷㄷㄷ;;;)...을 다 읽도록 바쁜척만 한다면 정말 못된 애인이겠군요!! ㅎㅎ 218권 중에 내가 읽은 책은 몇 권이나 될까 살짝쿵 반성해보면서... ㅎㅎ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시간을 할애하는 캐티님은 지고지순한 애인인가봐요!! ^^;; 내가 사회적으로 맡은 임무와 책임이라는게 있다보면 참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닌거 같거든요. 아무튼 정말 바쁜 이성을 애인으로 둔다는 것, 그것은 힘들고 외롭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하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마음인 것 같아요 ^^
Commented by Special ㅡ뚱ㅡ at 2009/09/14 00:48
바쁜여자...
Commented by 에스메랄다 at 2009/09/14 20:29
누구 말씀하시는거예요??;; ㅎ
Commented by 솔직녀 at 2009/09/14 01:05
바쁘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소홀히 하는 것을 마냥 이해해주고, '그래 넌 바쁘니까 내가 참을께' 하는 자세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도 바쁜 사람들 많이 봤는데요, 아무리 바빠도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잠자는 시간을 줄이던지 해서라도 시간을 내더라고요. 짬짬이 몇 분이지만 전화도 하고요.

결론은 얼마나 좋아하는냐의 정도 문제인듯해요.
Commented by 에스메랄다 at 2009/09/14 20:31
잠자는 시간마저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ㅎㅎ 짬짬이 보내는 문자나 짧은 전화통화에 어느정도 만족하며 너무 투정부리지 않는 것. 원래 바빴으니 배째라는 자세가 아니라면, 그 사람의 일이 그리 바쁘다면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줘야 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였지요 ㅎㅎ

근데 얼마나 좋아하느냐의 정도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나이도 상당히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ㅎㅎㅎ
Commented by 미노 at 2009/09/14 08:06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 으로 변하는것 같아요.. 어떤사람은 "아, 내가 연락 못해도 그 사람이니깐 이해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겠죠..? 그 사람이라서, 그 사람이니깐,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좀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죠... 사람마다 표현 방법이 달라서 그런가봐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보여주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기일회(一期一會)라고 합니다. 살면서 단 한번 만나는 인연일수 있으니,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것이 서로를 위하는게 아닐까요.. ^^
Commented by 에스메랄다 at 2009/09/14 20:34
입장을 무조건 봐주라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표현된다면, 그래서 믿음이 생긴다면 이해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 그 사람의 최선이 나에게는 성이 안차는 경우도 생기잖아요.

사랑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보여주고 느끼는 것, 가장 핵심이네요... ^^
Commented by 최서희 at 2009/09/16 09:21
퍼가요~ 정말 소름돋을정도로 공감하고 배워갑니다.
Commented by 에스메랄다 at 2009/09/17 00:31
과찬이십니다 ^^;;;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서 올린 것이니 너무 맹신(?)하지 마시고 그냥 가볍게 읽어주세요 ^^;;
Commented by MH at 2009/09/16 14:30
바쁜 남자 혹은 애인과 연애를 하는 저로서는 정말 눈물없이 느낄 수 없는 공감대가... 글 잘읽고 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갑니다:D
Commented by 에스메랄다 at 2009/09/17 00:32
허접한 글에 이런 과찬을...해주시니 그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 그냥 가볍게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해주세요 ^^
Commented by 타타타 at 2009/09/17 03:03
...........완전 공감해요............이런걸 일찍 알았더라면....!
후회가 밀려오네요......요즘 저런 반성 많이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ㅜㅜㅜㅜ....
Commented by 에스메랄다 at 2009/09/17 23:07
에궁.. 토닥토닥... 때로는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 어떤 분들은 무조건 인내하고 봐주는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참는 스트레스가 인연을 놓치는 아픔보다 크다면, 내가 그 사람의 인생에서 제외당하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누구나 투정부리고 화가 나겠죠... 이미 끝이 보이는 게임이라면 스스로 자책하는게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올테니 그러지 말았으면..하네요 ^^

더 좋은 인연이 생길거예요 ^^
Commented by 이궁 at 2009/09/26 13:41
이론뿐인듯
그렇게 바쁜것이 30년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요..
둘만의 기억도 별로 없이 내 문화적 지식만 가득 차겠군요..
Commented by 이궁 at 2009/09/26 13:54
나도 바쁘기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라에서라도 평범한 연애를 포기하면서
이해할 수 있는지 아니면,

절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소박한 또 다른 행복을 바란다면, 때로는 결단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Commented by 아름 at 2009/10/02 00:14
이야! 언니!! 컴터 고치고 오랜만에 왔더니, 이런 일이 있었군요! ^^
Commented by 온돌 at 2009/10/14 21:41
나도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많은 글도 올라와있고, 많은 일도 있었네요.
네이트 두번째 진출도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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