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밤을 하루 남겨 놓은 오후

몸이 많이 아팠다. 요즘 최신 유행이라는 신종플루 환자 대열에 나도 동참한 것일까 걱정이 되었으나 결론은 아니었다. 요 근래 몸을 좀 혹사 시켰더니 편도선이 붓고 열이 났던 것이다. 편도선이 붓는 건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손님 같은 병이다. 몸 좀 쉬게 해주라는, 무리하지 말라는 내 몸의 아우성인지도 모르겠다.

좀 살만해지자 미뤄왔던 점심 약속을 드디어 이행하였다. 광화문에서 점심을 먹고 은행잎 노랗게 물든 거리를 걸어 삼청동에서 커피를 마셨다. 시내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정말이지 공기가 나쁘다. 매연 때문에 나아가던 목이 도로 콱 막히고 폐병 환자같은 기침이 연신 쏟아졌다.

요즘들어 가벼워진 주머니를 한껏 걱정하면서도, 교보문고에서 김연수 작가의 책 6권을 쓸어 담으며 이젠 몸이 아픈게 아니라 정신이 아픈거 아닐까, 라는 우려가 들었다. 안하던 짓 하면 죽는다던데. 무언가 생각이 많아질 때 더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하는 책을 읽는 것은 급성 편도염에 걸렸는데 신종 플루까지 겹쳐 편도염 따윈 아무것도 아닌게 되어버리는, 그런 상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낑낑 거리며 무거운 책을 들고 돌아 오는데 다시 목이 아파오고 기침이 쏟아져 편도염도 이겨내기 쉬운 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나는 '밤을 노래한다' 나는 항상 '여행할 권리'를 갖으며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만나러 갈 수도 있다. 그곳에서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작가를 만나 '꾿바이, 이상'을 외치고 싶다.



by 에스메랄다 | 2009/10/30 17:25 | 숨쉬며 사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 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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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그 사내가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by 에스메랄다 | 2009/10/25 03:10 | 읽고 듣고 보고 느끼기 | 트랙백 | 덧글(0)

출국 전, 마지막 전화

좋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한, 우리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친구가 있었다. (광고 기획자라니. 말만 들어도 폼나고 근사한 직업이 아닐 수가 없었다.)

광고는 15초라는 시간에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이라며 술 마실 때마다 우리를 어안벙벙하게 만드는 멘트를 날렸던 친구였다. 각종 대학생 광고 공모전 등을 휩쓸며 어릴 때부터 자기의 꿈을 부던히 쫓던 친구였다. 광고에 이 한 몸 바치리라는 그녀의 열정은 조국 해방에 이 한 몸 불사르리라는 유관순 언니보다 더 맹렬해 보였고, 입사 후 얼마 안 돼 직접 광고 기획에 참여하여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친구였다. 그 후 얼굴 보기 무척 어려웠지만 가끔 만나면 자신이 만든 광고를 보았냐며 신이 나서 떠들던 친구였다.

그랬던 그 친구가 내일이면 한국을 떠난단다.
광고가 좋아 스스로를 광고쟁이라 거리낌 없이 부르던 친구가 이제 광고쟁이 안 한단다.
광고에 대한 청진한 열정만으로 조직 생활을 버티기에는 몸과 마음이 너무 많이 망가졌단다.

몇 주전 그 친구의 조촐한 환송 파티를 했었다.
호리호리하던 몸이 비대하게 뚱뚱해진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지만 마음까지 그 정도로 힘든 줄은 몰랐었다.
열심히 돈 벌다가 자신을 몽땅 잃을 것 같다며 씁쓸히 웃던 모습에 자꾸 마음이 아팠다.
그 친구에게 언제부터 광고가 월급 받고 하는 '회사일'이 되었나를 생각하느라 나는 술을 마시면서도 자꾸 갸우뚱거렸다.

한국을 떠나면 다신 안 돌아올거라고 했었다.
나 보러도 안 올거냐고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묻자 비행기표 보내 줄테니 나보고 오란다.
당분간은 이 곳에 오고 싶지 않다고, 나이가 좀 더 들어서 나고 자란 곳이 그리워지면 그 때 돌아오겠다고 한다.

비행기 시간이 내일 이른 새벽이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화를 했단다.
바로 그 곳으로 살러 가는 것은 아니고 여행을 좀 하다가 들어 갈 거라고 한다.
어릴 때 외국 생활을 한 경험이 많아 워낙 영어가 유창한데다 계획성까지 있는 친구라
가서도 잘 살 것 같다고 하자
최소한 여기보다는 낫겠지, 라며 또 씁쓸하게 웃는다.
 
나보고 잘 있으라고, 보고 싶을 거란다.
내 엉뚱한 공상이 일 하는데 가끔 도움이 되기도 했다며 이제 그런 헛소리 받아줄 사람 없어져서 어쩌냐고 내 걱정을 한다.
나는 강아지들과도 대화를 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니가 그러니까 더 걱정이라고 한다.
아무튼 나는 걱정하지 말고 약속한 비행기표나 보내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전화기 너머로 그 친구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서로 말 없이 전화기를 들고 투둑. 뚝뚝. 뚜뚜뚝. 또르르. 또로록. 뚜룩뚜룩. 똑똑,
눈물 떨어지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살 좀 쪄라. 건강하고. 너는 언제나 니가 원하는대로 잘 살고 있을 것 같아.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남들이 뭐라하든. 그러니까 살 좀 쪄라. 아프지말고. 아무튼 살 좀 찌고 잘 지내라.

살 좀 찌라는 말을 여러번 남기고 딸각. 전화가 끊어졌다.  

by 에스메랄다 | 2009/10/20 00:05 | 숨쉬며 사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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